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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그레고리오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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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는 1406년부터 1415년까지 재위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이다. 그는 1327년경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카스텔로 주교,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를 거쳐 1405년 추기경이 되었다. 서구 대이교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아비뇽의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피사 공의회에서 폐위되었으나 이에 불복했다. 이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퇴위를 결정하고 1415년 사임했으며, 그 후 안코나에서 지내다 레카나티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임은 교회 분열 종식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2013년 베네딕토 16세 사임 전까지 교황직에서 물러난 마지막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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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그레고리오 1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그레고리오 12세
본명안젤로 코레르 (또는 코라리오)
출생1327년경,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사망1417년 10월 18일, 교황령 레카나티
재임 기간1406년 11월 30일 ~ 1415년 7월 4일
교황 관련 정보
직함로마 교구 주교
이전 교황인노첸시오 7세
다음 교황마르티노 5세
대립 교황아비뇽 교황청 주장자: 베네딕토 13세 피사 공의회 주장자: 알렉산데르 5세, 요한 23세
성직 수임해당사항 없음
서품해당사항 없음
주교 서임1390년
주교 서임자해당사항 없음
추기경 임명1405년 6월 12일
추기경 임명자인노첸시오 7세
그레고리오 12세 문장
그레고리오 12세 문장
추가 정보
이전 보직카스텔로 주교 (1380–1390) 네그레폰테 섬 주교 (1387–1390) 콘스탄티노폴리스 명의 총대주교 (1390–1405) 산 마르코 성당 추기경 (1405–1406) 마체라타-톨렌티노 주교 (1415–1417)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도 행정관 (1406–1409) 포르토 에 산타 루피나 주교급 추기경 (1415–1417)
참고
비고그레고리오

2. 생애

1406년 콘클라베에서 서구 대분열 종식을 위해 필요시 퇴위하겠다는 약속 하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22]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비뇽의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 역시 퇴위를 거부하면서 양측의 교섭은 결렬되었다. 게다가 1408년, 그레고리오 12세는 조카 가브리엘로 콘돌메르(훗날 에우제니오 4세)를 포함한 4명의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하여 아비뇽 측과의 동수 유지를 약속했던 맹세를 어김으로써 추기경들의 신망을 잃었다.[15][16]

1409년,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 양측을 모두 불신하게 된 추기경들은 피사 공의회를 소집하여 두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고 새로운 교황으로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했다. 그러나 두 교황 모두 이를 인정하지 않아 결국 3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알렉산데르 5세가 1410년에 사망하자 요한 23세가 그 뒤를 이었다.[17][18]

그레고리오 12세를 지지했던 로마왕 루프레히트가 1410년 사망하고, 나폴리의 라디슬라오마저 요한 23세 지지로 돌아서면서 그레고리오 12세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결국 그는 1412년 리미니로 피신해야 했다.[19]

1414년 시작된 콘스탄츠 공의회는 서구 대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3명의 교황 모두의 폐위를 결의했다. 그레고리오 12세는 공의회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대리인을 파견하여 퇴위 의사를 밝혔고, 1415년 7월 4일 공식적으로 교황직에서 물러났다. 1417년 마르티노 5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길었던 서구 대분열 시대는 막을 내렸다.[20]

교황직에서 물러난 후, 그는 포르토의 주교 추기경으로 임명되어 안코나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레카나티에서 사망했다.

2. 1. 교황 선출 이전

안젤로 코레르는 1327년경 베네치아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4] 교황좌에 오르기 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1380년에 니콜로 모로시니 주교의 뒤를 이어 카스텔로 주교에 임명되었다.[22][4]

1390년 12월 1일 그는 명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총대주교에 임명되었다.[5] 이후 인노첸시오 7세의 비서관을 맡았고,[13][14] 1405년 6월 12일 인노첸시오 7세에 의해 산 마르코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23][5] 그는 1406년 11월 30일부터 1409년 10월 23일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사도적 관리자(교구장 서리)를 지냈다.[23][5]

2. 2. 교황 선출 (1406년)

인노첸시오 7세가 사망한 후, 로마에서는 불과 15명의 추기경들만 모여 콘클라베가 열렸다.[22] 이 콘클라베에 앞서 추기경들은 누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든지 간에, 아비뇽에 있는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1394–1423)가 교황직에 대한 주장을 포기한다면, 새로 선출된 교황 역시 자리에서 물러나 새로운 선거를 통해 서구 대이교(1378–1417)를 끝내기로 서로 약속했다.[22]

1406년 11월 30일, 안젤로 코레르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그는 이러한 명시적인 조건 하에 선출되었다. 그는 그레고리오 12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22] 그는 1380년에 카스텔로 주교, 1390년에 명목상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를 지냈고, 인노첸시오 7세의 비서관을 맡다가 1405년추기경이 되었다.[13][14]

3. 교황 재위 (1406년 - 1415년)

1406년 인노첸시오 7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이후 열린 콘클라베에서 안젤로 코레르가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로 선출되었다.[13][14] 당시 아비뇽에는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가 있어 서방 분열이 지속되고 있었기에, 콘클라베에 참석한 추기경들은 분열 종식을 위해 베네딕토 13세와 협상하고 양측 교황이 함께 퇴위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 모두 퇴위할 의사가 없었고, 상호 불신으로 인해 협상은 결렬되었다. 더욱이 1408년, 그레고리오 12세는 자신의 조카 가브리엘로 콘돌메르(훗날 에우제니오 4세)를 포함한 새로운 추기경 4명을 임명하며 콘클라베에서의 서약을 어겼고, 이로 인해 추기경들의 신망을 잃었다.[15][16] 이러한 상황은 교회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1409년, 양측 교황에게 등을 돌린 추기경들이 피사 공의회를 소집하여 두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고 새로운 교황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했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가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교회는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는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졌다. 알렉산데르 5세가 1410년 사망하자 요한 23세가 그 뒤를 이었다.[17][18]

그레고리오 12세는 초기에는 로마왕 루프레히트나 나폴리의 라디슬라오 왕 등의 지지를 받았으나, 1410년 루프레히트가 사망하고 새로운 로마왕으로 선출된 지기스문트와 라디슬라오마저 요한 23세 지지로 돌아서면서 그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결국 그는 1412년 리미니로 피신해야 했다.[19]

1414년부터 개최된 콘스탄츠 공의회는 교회 대분열을 종식시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공의회는 세 명의 교황 모두의 퇴위를 추진했고, 그레고리오 12세는 비록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대리인을 파견하여 1415년 7월 4일 공식적으로 교황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417년 마르티노 5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마침내 서방 분열은 해소되었다.[20]

교황직에서 물러난 후, 그레고리오 12세는 포르토의 주교 추기경으로 임명되어 안코나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레카나티에서 사망했다.

3. 1. 교회 분열 심화

로마의 교황과 아비뇽의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서방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리구리아의 사보나라는 중립 지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신중하게 협상을 시작했다.[22][4] 그러나 양측의 깊은 불신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회담은 결렬되었다. 특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의 지지자였던 나폴리의 라디슬라오 왕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양측의 회동을 적극적으로 방해했으며, 교황과 대립교황 모두 각자의 지지 세력에 의해 사실상 좌지우지되는 형편이었다.[22][4]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레고리오 12세 휘하의 추기경들은 교황의 리더십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며 등을 돌릴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1408년 5월 4일, 그레고리오 12세는 추기경들을 루카로 소집하고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허락 없이는 도시를 떠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는 콘클라베 당시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지만, 이를 어기고 자신의 지지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조카 4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여기에는 훗날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되는 가브리엘로 콘둘메르도 포함되어 있었다.[15][16] 이는 콘클라베에서의 서약을 정면으로 위배한 행위로, 추기경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7명의 추기경이 루카를 몰래 빠져나와 베네딕토 13세 측 추기경들과 접촉하여 협상을 벌였다. 이들은 양측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1409년 피사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두 교황 모두에게 참석을 요청했으나,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는 모두 공의회에 불참했다. 한편, 그레고리오 12세는 그의 충실한 보호자이자 콘도티에로카를로 1세 말라테스타의 지원을 받으며 리미니에 머물렀는데, 말라테스타는 공의회 기간 동안 그레고리오 12세를 지지하기 위해 직접 피사로 가기도 했다.[6]

1409년 6월 5일, 제15차 회기에서 피사 공의회는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 모두를 교회 분열, 이단, 위증, 스캔들의 죄목으로 폐위한다고 선언했다.[24][7] 그리고 같은 달 말, 공의회는 밀라노 대주교 피에트로 필라르고를 새로운 교황 대립교황 알렉산데르 5세로 선출했다.[24][17][18] 이에 맞서 그레고리오 12세는 10명의 추기경을 추가로 서임하고 아퀼레이아 인근 치비달레 델 프리울리에서 독자적인 공의회를 소집했으나, 소수의 주교만이 참석하는 데 그쳤다. 이 공의회에서 그레고리오 12세 측은 베네딕토 13세와 알렉산데르 5세를 분열주의자, 위증자, 교회 파괴자로 선언했지만, 이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알렉산데르 5세는 다음 해인 1410년에 사망했고, 대립교황 요한 23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17][18] 이로써 로마, 아비뇽, 피사에 각각 교황을 자처하는 인물이 들어서면서 교회는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최악의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3. 2. 피사 공의회 (1409년)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와 아비뇽의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는 리구리아의 사보나에 있는 중립 지역에서 만나기로 신중하게 협상에 들어갔으나, 나폴리의 라디슬라오 왕과 같은 정치 세력의 방해와 상호 불신으로 인해 그들의 결심은 흔들렸다.[22][4] 양측 모두 상대방 지지자들에게 체포될 것을 두려워했으며, 사실상 각자의 정파에 휘둘리는 실정이었다.[4][22]

그레고리오 12세 휘하의 추기경들은 이러한 상황과 교황의 책략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으며, 심지어 교황을 버릴 수도 있다는 의사를 내비쳤다.[22][4] 1408년 5월 4일, 그레고리오 12세는 추기경들을 루카에 소집하고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허락 없이는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명령했다.[22][4] 그는 또한 콘클라베 당시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을 어기고, 자신의 지지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카 네 명(훗날의 교황 에우제니오 4세 포함)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다.[22][4][15][16] 이 결정은 그레고리오 12세의 인망을 더욱 잃게 만들었다.

이에 반발한 7명의 추기경들은 루카를 몰래 빠져나와,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 측 추기경들과 협상에 나섰다.[22][4] 양측 추기경들은 두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공동의 공의회를 소집하는 데 합의했다.[22][4] 공의회주의 사상이 힘을 얻던 시기였던[17] 1409년, 이들은 피사에서 피사 공의회를 개최하고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 모두에게 참석을 요청했으나, 두 교황 모두 공의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22][4][17] 당시 그레고리오 12세는 그의 충실한 보호자이자 콘도티에로카를로 1세 말라테스타의 비호 아래 리미니에 머물고 있었으며, 말라테스타는 그레고리오 12세를 대신하여 피사 공의회에 참석해 그를 변호하려 했다.[6]

1409년 6월 5일, 제15차 회기에서 피사 공의회는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 두 교황을 교회 분열, 이단, 위증, 스캔들의 죄목으로 폐위한다고 선언했다.[24][7] 그리고 그 달 말, 공의회는 밀라노 대주교였던 피에트로 필라르고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하니, 그가 바로 대립교황 알렉산데르 5세 (1409–1410)이다.[24][7][17][18]

이에 맞서 그레고리오 12세는 열 명의 추기경을 추가로 서임하고,[24][7] 아퀼레이아 인근 치비달레 델 프리울리에서 맞불 성격의 공의회를 소집했으나, 소수의 주교들만 참석하여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4][7] 그레고리오 12세의 추기경단은 이 공의회에서 베네딕토 13세와 알렉산데르 5세를 이교도, 위증자, 교회 파괴주의자로 선언했지만, 이러한 주장은 무시되었다.[24][7]

결과적으로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 모두 피사 공의회의 폐위 결정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로마(그레고리오 12세), 아비뇽(베네딕토 13세), 피사(알렉산데르 5세)에 각각 교황을 자처하는 세 명의 인물이 동시에 존재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17][18] 대립교황 알렉산데르 5세는 선출된 지 약 1년 만인 1410년에 사망했고, 발다사레 코사가 그 뒤를 이어 대립교황 요한 23세가 되었다.[24][7][17][18]

3. 3. 콘스탄츠 공의회와 사임 (1414년 - 1415년)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가 소집되어 서구 대이교 사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는 카를로 말라테스타와 두브로브니크(당시 라구사 공화국)의 조반니 도미니치 추기경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하여 공의회에 참석시켰다. 조반니 도미니치 추기경은 공의회를 소집하고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는 교령들을 승인하여 교황의 권위를 형식적으로 유지했다.

1415년 7월 4일, 카를로 말라테스타는 그레고리오 12세의 이름으로 그의 사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공의회는 이를 수락하였다. 사전에 합의된 바에 따라, 공의회는 그레고리오 12세가 임명한 모든 추기경들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동의했으며, 이는 교황의 가문인 코레르 가문을 만족시키는 조치였다. 또한 그레고리오 12세는 프라스카티의 주교, 추기경단 단장, 그리고 안코나의 종신 교황 사절로 임명되었다.

공의회는 이어서 대립 교황 요한 23세를 폐위시켰다. 이후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의 추종자들이 공의회에 참여하자, 공의회는 베네딕토 13세마저 폐위를 선언하였다. 이로써 서구 대이교는 마침내 종식되었다. 새로운 교황을 선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그레고리오 12세가 사망한 '후'인 1417년교황 마르티노 5세가 선출되었다.[9] 이 때문에 교황 공석기는 약 2년 동안 지속되었다.

4. 퇴위 이후와 죽음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7월 4일 교황직에서 정식으로 물러났다.[20] 퇴위 후에는 포르토의 주교 추기경 직함을 받았다. 이후 안코나에서 평화롭게 여생을 보냈으며,[25][10] 레카나티에서 선종했다. 그레고리오 12세는 약 600년 후인 2013년 2월 2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사임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퇴위한 교황으로 기록되었다.[25][10]

5. 평가

그레고리오 12세의 사임은 서방 교회 대분열을 종식시킨 콘스탄츠 공의회의 중요한 결정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의 사임은 교황 역사상 매우 드문 일이었으며, 약 600년 후인 2013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사임하기 전까지는 마지막 교황 사임 사례였다.[25][10] 사임 후 그는 안코나에서 평화롭게 여생을 보내다가 선종했다.

서방 교회 대분열이라는 혼란스러운 시기 때문에 그레고리오 12세의 정통성과 재위 기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왔다. 교황 연감(Annuario Pontificio)은 오랫동안 피사 공의회(1409년)의 결정을 존중하여, 20세기 중반까지 그레고리오 12세의 재위 기간을 1406년부터 1409년까지로 기록했다. 이에 따라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알렉산데르 5세(1409년–1410년)와 그의 뒤를 이은 요한 23세(1410년–1415년)를 정통 교황으로 간주했었다.[11]

그러나 1958년 교황 요한 23세가 즉위하면서 이러한 해석은 바뀌게 된다. 새 교황은 자신의 이름으로 '요한 23세'를 선택했는데, 이는 "의심할 여지 없는 정통성을 가진 22명의 요한"이 있었다고 언급하며[12]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요한 23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음을 시사한 것이었다. 이 재해석에 따라 현대의 교황 연감은 그레고리오 12세의 재위 기간을 1415년까지로 연장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알렉산데르 5세와 첫 번째 요한 23세는 대립 교황으로 분류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Gregory XII.
[2] 웹사이트 Correr, Angelo https://cardinals.fi[...]
[3] 서적 Life and Death in a Venetian Convent: the chronicle and necrology of Corpus Domini, 1395–1436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4] 간행물 Pope Gregory XII.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2015-12-30
[5] 웹사이트 Titular Episcopal See of Castello http://www.gcatholic[...] 2022-12-19
[6] 서적 A History of the Papacy from the Great Schism to the Sack of Rome Longmans, Green, and Company
[7] 뉴스 Pope Gregory XII, the last pope to resign, stepped down amid the Great Western Schism in 1415 http://www.nydailyne[...] 2013-02-11
[8] 서적 Life and Death in a Venetian Convent: the chronicle and necrology of Corpus Domini, 1395–1436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9] 서적 Life and Death in a Venetian Convent: the chronicle and necrology of Corpus Domini, 1395–1436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0] 뉴스 Pope Benedict XVI to resign citing poor health https://www.bbc.co.u[...] BBC News 2013-02-11
[11] 서적 Annuario pontificio per l'anno 1942 1942
[12] 잡지 I Choose John ... http://content.time.[...] 1958-11-10
[13] 문서 新カトリック大事典編纂委員会、P640。
[14] 문서 バンソン、P131。
[15] 문서 スチュアート、P184。
[16] 문서 瀬原、P227。
[17] 문서 バンソン、P132。
[18] 문서 鈴本、P138 - P139、瀬原、P227 - P228、P248。
[19] 문서 鈴本、P160 - P161、スチュアート、P184 - P185、瀬原、P248、P259。
[20] 문서 鈴本、P143、P146、スチュアート、P185、瀬原、P249 - P252、P269。
[21] 웹사이트 Cardinals of the Holy Roman Church http://www2.fiu.edu/[...]
[22] 간행물 Pope Gregory XII.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2015-12-30
[23] 웹인용 Titular Episcopal See of Castello http://www.gcatholic[...] 2013-11-24
[24] 뉴스 Pope Gregory XII, the last pope to resign, stepped down amid the Great Western Schism in 1415 http://www.nydailyne[...] 2013-02-11
[25] 웹인용 Pope Benedict XVI to resign citing poor health http://www.bbc.co.uk[...] BBC News 2013-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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